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포드 (문단 편집) == 인물평 == 1910년대[* 할리우드에서 일하던 친형을 따라 영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부터 1960년대까지 활약한 고전 할리우드의 거장.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오슨 웰스]], [[잉마르 베리만]] 등이 그를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 후대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등 할리우드 상업영화 거장들은 물론, [[페드로 코스타]], [[홍상수]], [[아오야마 신지]], [[다르덴 형제]] 등과 같은 유럽, 아시아권의 작가주의적 성향을 띠는 감독들 역시 그를 존경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그는 영화의 서사도 뛰어나게 그려냈지만, 단순히 영화가 어떤 서사를 담는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카메라]]로 어떤 각도에서 어떤 조명으로, 또 어떤 배우가 어떤 소품들과 어떤 움직임으로 찍을 것인가라는 문제들에서, 그 전에 없던 기가 막히게 세련된 방식들을 보이며 영상 문법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영화의 틀을 만들어낸 위대한 영화인이며, 수십년이 지나서도 후배들에게 표본이 되고 있다. 그가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끼진 영향이 워낙 지대해서, 존 포드의 서부극 -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활극 - [[세르조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이어지는 계보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계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후계자들을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나 〈[[스타워즈 시리즈]]〉와 같은 고전 활극은 말할 것도 없고, [[슈퍼히어로 영화]]를 비롯한 현대의 [[블록버스터(영화)|블록버스터]] 영화들에게도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성일]]은 2004년 5월 dvd21에 기고한 '영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장 뤽 고다르' 도입부 에서 포드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장 뤽 고다르|고다르]]에게서 시작한 사람이다. 이 말은 비유법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고다르보다 존 포드를 먼저 보았다. 〈[[역마차(영화)|역마차]]〉와 〈[[황야의 결투]]〉, 혹은 '기병대' 삼부작, 물론 〈[[수색자]]〉 그리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 1960년대의 웨스턴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작정 영화를 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으로 고다르 영화를 보았다. 처음 만난 고다르 영화는 〈기관총 부대〉다(사실 그때 나는 고다르라는 이름을 알고만 있었다). 그래서 고다르에서 거꾸로 존 포드에게로 돌아오는 여정 길을 택했다. 물론 고다르보다 영화적으로 존 포드가 훨씬 위대하다. 그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안토니오니]]나 [[잉마르 베리만|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펠리니]]보다 [[장 르누아르]]가 훨씬 위대한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건 단지 존 포드와 장 르누아르가 그들보다 시간적으로 더 앞섰기 때문이 아니다. 존 포드와 장 르누아르는 영화에서 두 개의 이름이다(혹시 존 포드의 자리에 [[앨프리드 히치콕]]을 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이름은 그 누구도 안 된다). 아무도 이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들을 넘어설 때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로베르 브레송|브레송]]과 [[오즈 야스지로|오즈]], [[로베르토 로셀리니|로셀리니]], 그리고 [[루이스 부뉘엘|부뉴엘]] 정도가 그 두 사람(혹은 세 사람)의 이름의 비슷한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안 되겠다. 그들의 영화는 매 번의 쇼트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총체적 사유를 던진다. 혹은 샷을 연결하여 신을 만들 때 그 자체로 항상 완전하다. 그건 더 나은 그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시간에 대한 주름은 더할 나위 없이 깊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국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성일은 역사상 모든 영화인 중 장 뤽 고다르[* 젊은 나이에 고다르의 영화를 못 봤다면 영화인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정도다. 어렸던 자신에게 영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준 인물이라며,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게 만든 [[코페르니쿠스]]에 비유했을 정도이니 그 애정은 말도 못하게 깊다.]를 제일 좋아한다고 30년을 말한 사람인데도 이렇게 썼다. 정성일 평론가 특유의 [[만연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포드 감독에 대한 다른 영화비평가들의 입장도 수식어구만 다를 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다 감독상(4회) 수상자이다. 재밌는 것은 그를 지칭하는 '서부극의 대가'라는 닉네임과 달리 수상작 모두 비서부극이라는 사실이다. 1936년 〈[[밀고자]]〉, 1941년 〈[[분노의 포도]]〉, 1942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53년 〈[[말 없는 사나이]]〉.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 등 위대한 배우들을 발굴하거나 진가를 조명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존 웨인 같은 경우 포드 영화에 단역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훗날 서부극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본인은 존 웨인이 연기도 못하는 녀석이라고 구박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하워드 혹스]]의 〈붉은 강〉에서 존 웨인이 연기하는 걸 보고, "그 덩치 큰 [[개자식]]이 연기할 줄은 몰랐지!"라며 그제야 존 웨인을 대우했다. 이후 웨인을 〈[[황색 리본을 한 여자]]〉의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배우-감독 협업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서부극의 대표적인 명소인 [[모뉴먼트 밸리]] 역시 그가 '발견'했다. 1939년작인 〈[[역마차(영화)|역마차]]〉에 처음 등장한 이후 그가 촬영장소로 재차 활용하며, 관객들이 서부극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로 만들어냈다. 《[[라이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리스트에 포함된 영화 감독은 존 포드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D.W. 그리피스]]뿐. [[https://www.google.com/amp/s/www.deseret.com/platform/amp/1990/9/1/18878997/life-lists-20th-century-s-most-influential-americans-br|#]] 그 업적과 영향력으로 영화 커뮤니티 등지에선 [[영화 감독]] 끝판왕 취급을 받고 있다.[[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movie2&no=400680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